들어가면서
스코틀랜드 장로교회의 형성과정에 있어서 17C 언약도 운동과 그 역사적 배경에 대해서 알필요가 있다. 언약도 운동은 장로교 신앙정신을 당시의 정치적 정황 속에서 이해하도록 해주며 우리가 믿는 장로교 신앙과 제도를 지금까지 이끌어 옴에 있어서 어떠한 희생적 투쟁이 있었는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1. 제임스 1세의 통치(1603-1625) : 왕권신수설 / 언약도 운동을 일으킨 장본인
제임스 1세는 그의 어머니 메리 스튜어트 여왕이 영국으로 망명하게 되면서 제임스 6세라는 이름으로 스코틀랜드의 왕이 된다. 제임스의 재임기간동안 많은 권력다툼이 있었고 그는 이를 통해 절대적인 왕권의 확립이 곧 평화로운 행복을 가져올 수 있다고 생각하게 된다. 이에 따라 제임스 6세는 성년이 되던 해인 1587년 6월 몰튼에 의한 섭정의 시대를 끝내고 왕권을 강화시키기 위해 교회 지배와 간섭을 위한 정책들을 만들어 갔다. 제임스는 국왕이 곧 법이다 라는 사상으로 ‘왕권신수설’을 주장한다. 32세(1598년)에 이르러서는 <자유 주제의 진정한 법>이라는 책을 익명으로 출간하며 왕은 신민의 생명과 재산에 대한 지배권을 가지며 왕은 국가의 주인으로써 자격을 가진다는 입장을 견지하였다. 이러한 주장은 당시 칼빈주의자들이 옹호하던 ‘지배권의 계약’, ‘저항권’에 관한 이론을 논박하기 위한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37세가 되던 해인 1603년 제임스 1세라는 이름으로 영국 왕에 부임했고 청교도들의 많은 지지와 함께 장로 제도의 도입을 요구하는 ‘천인의 관원서’를 전달했지만 이는 거절당하게 되었고, 그 이유는 그가 선호하던 감독제 아래에 영국과 스코틀랜드 교회를 통합하고자 하는 계획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당시 영국의 정치적 배경에는 감독제를 제거하자는 청교도가 다수의 하원 의석을 차지하고 있었음으로 제임스 1세에게 1604년을 기점으로 완강하게 청교도 목사들과 반대되는 감독제를 고수하는 입장을 밝히는 것은 그에게 정치적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
감독제 하에 영국과 스코틀랜드를 통치하겠다는 그의 계획과 이미 스코틀랜드가 장로교를 국교로 채택하고 있던 상태에서 계속해서 부딛칠 수 밖에 없었다. 이러한 충돌과 끊임없는 분쟁은 지속되었고 이러한 과정 속에서 나타난 신앙운동이 언약도 운동(Covenanters)이다.
1610년에 들어서면서 조직화된 감독제를 스코틀랜드 교회안에 도입하게 되었고, 보다 더 구체적인 감독제도 전환을 위해 ‘퍼스 5개 조항’을 통과시켰다. 이후 제임스 왕은 계속해서 왕권의 강화와, 감독제를 위한 종교적책을 펼쳤고 이후 1625년 사망한다.
2. 존 낙스(1514-1572) : 스코틀랜드 종교개혁
1560년 국가적 차원에서 종교개혁이 존 낙스에 의해 단행되었다. 하지만 곧 바로 감독 또는 주교 제도가 폐지되고 치리제도, 즉 장로제도가 정착된 것은 아니다. “스코틀랜드 신앙 고백서”는 의회에서 통과되었으나, “제 1 치리서”는 기각 되었기 때문이다.
3. 메리 스튜어트(1542-1587) : 감독제도의 재등장
종교개혁 이듬 해인 1561년 메리 스튜어트 여왕은 프랑스로부터 스코틀랜드로 귀국했고 메리는 로마 천주교 신앙과 예배 형식을 고집하였다. 이후 존 낙스의 병세가 악화되며 그 영향력이 줄어들게되면서 감독제도가 다시 나타나게 된다.
4. 앤드류 멜빌(1545-1622) : 장로제 신수론 / 제 2 치리서 / 장로 제도의 확립
존 낙스가 세상을 떠나고 2년 뒤 10년간의 제네바 유학을 마치고 스코틀랜드로 귀국하여 감독제가 부활한 것을 보고 ‘장로제 신수론’을 제창하였다. 당시 소년이었던 제임스 1세의 정치적 후견인인 몰톤(1572-1580)이 이 개혁운동에 반대했지만, 멜빌의 끈질긴 노력으로 1578년 “제 2 치리서”가 작성되고 1581년 출판되었다.
“제 2 치리서”는 국왕의 교회에 대한 간섭과, 감독제가 아닌 장로제도를 강하게 주장하는 내용이다. 의회의 승인은 얻지 못했지만, 장로교 총회에서 통과되며 이후 ‘장로교의 대헌장’으로 불리기도 한다.
하지만 영국의 감독제를 기반으로 스코틀랜드의 감독제화를 꾀하던 제임스왕의 정책에 의해 1605년 에버딘에서 총회를 개최하려 했지만 앤드류 멜빌과 주요 인물들은 온갖 야비한 수단들이 동원되어 추방당하게되고 1610년에는 스코틀랜드 교회 안에 조직화된 감독제가 도입되게 된다.
5. 알렉산더 헨더슨(1583-1646) : 퍼스 5개 조항 반대 / 국가로부터 교회의 독립
알렉산더 헨더슨은 퍼스 5개 조항이 강요되던 시기에 장로교회의 지도적 인사로써 이를 반대함으로써 그의 주장 가운데 스코틀랜드 장로교는 국가 권력으로부터 독립을 유지하며 영적 자유를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 강하게 나타났다.
6. 찰스 1세(1625-1649) : “기도서”개정 / 카톨릭적 영국교회
1625년 제임스 왕이 사망하고 그 아들인 찰스 1세가 왕위에 오른다. 그는 아버지인 제임스보다 더욱 철저한 왕권신수설을 주장하였고, 이후 스페인와 프랑스를 상대로하는 전쟁으로 인해 전쟁자금이 필요하게 되어 강제징세를 하게 되었고 그의 폭정으로 인해 결국 1628년 의회에서 국왕이 국법을 준수하도록 요구하는 문서인 ‘권리청원’이 제출 되었다. 그의 종교정책에서 눈여겨 봐야 할 점은 그가 맞이한 왕비인 앙리에뜨 마리에 의해 비밀조항으로 카톨릭을 보호할 것을 약속하고 있었다는 것이다. 1633년 기도서의 개정을 위한 준비와 함께 왕위에 즉위한지 만 30년 만에 스코틀랜드에 방문했지만 대관식을 영국교회의 감독제도 예식에 따랐기에 많은 장로교고와, 스코틀랜드인들의 불만을 사게 되었다.
1638년에 일어난 국민적 언약 운동에 대해 찰스는 무력으로 이를 진압하고자 1639년 제 1차 주교전쟁을 일으키지만 패배하게된다. 이후 다시금 1640년 8월 제 2차 주교전쟁을 일으키게 되고 또 다시 패배를 맛보게 된다. 이후 열린 장기국회에서 찰스의 군사고문인 토마스 웨트워드와 윌리엄 로오드를 탄핵, 투옥하계되었고 이것은 1660년 5월까지 20년간 지속된 영국혁명, 곧 청교도 혁명의 시작이었다.
찰스왕은 군사파견의 문제와, 종교문제에 있어서 의회와 분쟁이 일어나게 되고 서로 대립하게 된다. 찰스왕의 근위병을 중심으로한 왕당파는 1642년 의회군에 선전포고를 했다. 초반에는 우세했으나 결국 1644년 스코틀랜드의 지원을 받은 의회군에 굴복하게 되었고, 1649년 처형당하며 비극적인 종말을 맞이한다.
7. 윌리암 로오드(1573-1646) : 찰스 1세의 거짓 제사장 - 청교도의 탄압
윌리암 로오드는 찰스 1세가 왕권의 강화를 위해 주교로 임명한 사람이다. 찰스의 종교정책의 방향에 맞게 윌리암 로오드는 고교회파의 인물이었으며 천주교와의 타협을 하는 입장이었다. 이에 따라 영국 교회에 고교회파가 주를 이루며 청교도들에 대한 가혹한 탄압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에따라 1620년 메이플라워호를 타고 미국으로 향하는 일들이 생기게 되었으며 뉴잉글랜드라고 명명한 대륙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1620년 회중주의 원리에 따라 교회를 설립하기도 했다.
또한 윌리암 로오드는 정책적으로도 장로교회에 대한 탄압을 멈추지 않았다. 예를들면 영국교회의 공동 기도서를 약간 수정한“ 공동기도서(Book of Common prayer)”에 따라 예배드리도록 강요하였다. 낙스에 의해 1562년 작성된 공동기도서를 사용하던 스코틀랜드 교회는 이를 폐지하려는 찰스 1세에 대한 강한 반발을 일으키게 되었다.
이러한 찰스 1세와 윌리암 로오드의 종교정책에 대한 스코틀랜드 국민들의 분노는 신앙의 자유를 외치는 국민적 언약과 언약도 운동의 동기가 된 것이다.
8. 알렉산더 핸더슨 & 아키발드 존스톤 : 국민적 언약 / 웨스터민스터 신앙고백서
1638년부터 1688년까지를 보통 ‘언약도의 시기’라고 부른다. 그 시작은 1638년 2월 스코틀랜드 장로교회를 영국교회에 예속시키려는 처사에 반대하며 영적 자유를 지지하는이이들이 서명한 문서, 에딘버러에 있는 그레이프라이어교회에서 ‘국민적 언약’이라는 문서를 작성한 사람이 알렉산더 핸더슨과 아키발드 존스톤이다. 이를 통해 왕과 국가의 통제로부터 교회의 자유를 고양했을 뿐 만 아니라 그리스도만이 교회의 머리이며 하나님 만이 통치자라는 점을 선언한다는 점에 의미가 있다.
이후 1638년 11월 글라스고에서 소집된 장로교 총회에서는 찰스 1세에 의해 강요된 감독제와 그 의식을 거부하기로 결의하고, 참된 신앙계승을 위해서라면 무력이라도 사용할 것을 주장했다. 이때를 역사가들은 스코틀랜드의 제 2의 종교개혁이라고 부른다.
제 1의 종교개혁이 천주교로부터의 개혁이라면, 제 2종교개혁은 국교회인 성공회로부터의 개혁이었다. 결국 제임스 6세와 찰스 1세의 실패하게 되었고, 스코틀랜드인의 이러한 투쟁과 영적 자유를 향한 갈망은 장로교 신앙을 더욱 강화시켜주는 결과를 가져왔다.
이후 영국 의회와 스코틀랜드의 1643년 엄숙동맹과 국민적 언약에 의해 웨스터민스터 대회에 로버트 베일리, 샤무엘 루더포드, 조지 길레스피, 메이트랜과 함께 참석하게 된다. 이후 웨스터 민스터 신앙고백서를 확정짓고, 이는 후일 장로교의 중요한 신앙고백이 되었다.
9. 크롬웰(1599-1658) : 영국 의회군의 지도자 /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통치권 장악
찰스 2세가 1638년 ‘국민적 언약’에 서명하는 조건으로 스코틀랜드의 왕위에 오르지만 크롬웰에 의해 다시 화란으로 망명하게 된다. 당시 언약도는 절대적으로 국민적 언약에 대한 확신을 가지고 있던 항의파와, 국가의 생존과 차선책으로 감독교회도 받아들일 의사가 있언 온건한 언약파인 결의파가 있었다.
스코틀랜드를 점령한 크롬웰은 장로교 총회가 자신의 통치에 방해가 된다는 이유로 해산시키는 정책(1653)을 펼쳤지만, 이는 스코틀랜드 국민의 반감을 사게되고 끝내 1660년 찰스 2세가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왕으로 즉위함으로 왕정복로 인해 10년간의 공화정치는 막을 내린다.
10. 찰스 2세(1630-1685) : 국민언약 서명의 파기와 장로교에 대한 조롱
1660년 크롬웰의 사망으로 망명중이던 찰스 2세는 왕으로 추대되었고 스코틀랜드 국민은 찰스 2세가 국민언약에 서명했음으로 장로교 제도를 지켜줄 것으로 기대했다. 하지만 찰스 2세는 국민 언약을 파기하고 장로교를 조롱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1661년 왕의 우외권적 특권을 인정해야하는 ‘수정령’이 선포되고, ‘철폐령’을 제정하여 언약도 운동과 교회개혁적 입법을 무효화 시켰다. 이로인해 1662년 감독제도가 공식적으로 부활하게 되었다. 이 시기에 400명의 목사들이 감독제를 거부하고 거리에 나와 설교자가 될 수밖에 없었다. 이로인해 옥외집회가 유행하게 되었지만 이는 비밀집회로 간주되어 탄압과 방해를 받게 된다. 이 시대는 살인적 시기라고도 했으며 18,000여명의 언약도들이 순교자의 길을 가게 되었다.
11. 제임스 2세(재위기간, 1685-1688), 윌리엄 3세(1650-1702)
: 천주교 회복 시도의 실패 / 관용령과 성직추천령
찰스 2세의 사망 이후 제임스 2세가 왕이 되었고(1685) 그는 가톨릭 신자인 왕비 메리가 왕자를 출산하는 것을 계기로 가톨릭 회복을 선언한다. 1687년 자유로운 신앙의 선택을 허용하는 칙령을 발표하지만 영국의 모든 당파의 반대와 저항으로 왕위에 오른지 3년뒤인 1688년 추방되어 프랑스로 가게된다. 의회는 윌리엄 3세는와 메리의 공동왕위를 제의하고 권리장전이 승인된다. 이는 이른바 유혈이 없는 혁명으로 명예혁명이었다. 이를 계기로 왕권신수설, 로마교황과의 관계는 막을 내리고, 영국정치에서의 의회의 확립과 영국의 상류층 계급의 영향력이 확고해지게 된다.
윌리엄 3세는 스코틀랜드 장로제의 영향을 받은 성장 배경을 가지고 있으며 1689년 관용령이 의회를 통과하여 스코틀랜드와 영국은 종교적 자유를 누리게 된다. 이어서 1712년에서는 성직 추천령이 의회를 통과하게 되는데 이는 재산소유자들에게 교회의 임명권을 준다는 법률이었다. 하지만 이 법으로 인해 장로교회는 이후 130년간의 교회분열의 원인이 된다.
12. 에벤저 어스킨 : 협력노회로의 분리
스코틀랜드의 첫 분열은 1733년에 일어났고 에벤저 어스킨이 그 지도자격의 인물이었다. 어스킨은 언약파의 인물로 1732년 퍼스대회에서 총회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한 바 있다. 1733년 총회로부터 목사직을 정직과 제명을 당하게 되었지만 그들을 지지하던 무리와 함께 기존 교회와 분리하여 ‘협력노회’를 조직하였다. 이후 오웰 토마스 에어, 랄프 어스킨 등 유력인사들이 협력노회에 동참하였고 이 노회는 100년 후 다시 여러 교회로 분열 되었다. 이 노회는 후일 ‘미국 협력개혁장로교회’를 생기게한 모체가 된다.
13. 아담 깁 : 어스킨의 제명과 또다른 분열(새빛파와 옛빛파)
협력노회는 1747년 다시 버거파와 반 버거파로 시민의 맹세에 대한 이견차로 나누어지게 된다. 아담 깁은 반 버거파의 입장의 지도자격 인물이다. 버거파는 1799년 새빛파와 옛빛파로 양분되고, 옛빛파(친 정부)는 1839년 스코틀랜드교회에 합해졌고, 새빛파는 1847년 연합장로교회에 통합된다.
14. 토마스 길레스피(1708-1774) : 목사추천제도 반대와 구원노회의 조직
1761년 토마스 길레스피는 성직추천령에 반대하며 스코틀랜드교회를 떠나 ‘구원노회’를 조직한다. 그는 결국 총회의 요구에도 반대하며 해임되었고 이 구원노회와 협력노회의 이탈한 인사들이 합동하여 1847년 연합장로교회가 조직되게 된다.
15. 토마스 찰머스
1843년 성직 추천령에 반대하며 토마스 찰머스는 472명의 목사와 함께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를 조직한다. 이러한 대분열과 같은 저항에 부딪치자 의회는 1874년 이 법령을 폐지하고 스코틀랜드교회는 다시 장로교정치원리를 회복하게 된다.
스코틀랜드 자유교회는 연합장로교회와 합동하여 ‘스코틀랜드 연합자유교회’를 조직하고 교세는 50만이 넘게 된다. 이때 잔류한 스코틀랜드 자유교회의 합동을 반대한 25명의 목사는 재산의 소유권을 주장하여 승소하게된다.
이후 1929년 스코틀랜드교회와 스코틀랜드 연합자유교회가 합동하여 ‘스코틀랜드 교회’를 조직하게되고 스코틀랜드장로교회의 주류를 이루게 된다. 하지만 이 연합에 반대하여 잔류한 목사도 있다.
'책 리뷰 > 신앙 관련 서적' 카테고리의 다른 글
[복음전도란 무엇인가] #4. 제임스 패커 / 복음 전도의 동기 / 하나님의 사랑 / 이웃사랑 (0) | 2022.11.23 |
---|---|
[복음전도란 무엇인가] #3. 제임스 패커 / 복음 전도 / 바울의 복음전도 / 하나님에 관한 메시지 (0) | 2022.11.12 |
<죽음, 가장 큰 선물> 완벽 요약, 핵심 정리, 독서감상문 (2) | 2022.10.07 |
#7. [예배의 감격에 빠져라] 김남준 목사님 책 요약 / 어느 사형수의 노래 (0) | 2022.07.30 |
[꾸밈없는 사람들] #2. 4장 요약, 정리, 결론 / 정신적 장애 / 발달 장애 (0) | 2022.07.21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