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 1장 > 오늘날의 설교가 (여전히) 미래를 기약할 수 있는가?
기독교 복음이라는 것은 한편으로는 어리석어 보이고 완전히 난센스인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바로 이점이 기독교 설교의 핵심이다. 하나님의 말씀은 사람들을 고치며 구원하고 신비롭게 작용하는 힘의 근원이시다. 그 안에 사람들에게 전달하기 위해 인간의 언어라는 수단을 선택하셨다. 하지만 하나님과의 관계 회복을 위해 잔혹한 십자가 형벌을 감당한 그 예수님에 대하여 과거 로마시대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많은 사람들이 조롱하며 비난하고, 기독교 설교에 대한 믿음을 포기했다. 오늘날 또한 기독교 설교에 대한 회의적인 시각과 복음의 난세스로서의 설교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를 많이 찾아볼 수 있다. 먼저 사회 과학의 관점에서 볼 때 오늘날 기독교 설교자들은 과연 문명사적인 패러다임의 전환에 대해 심각하게 고려하고 있는가? 와 같은 입장이 있다.
설교 심포니:살아 있는 복음의 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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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저 포스트모더니즘이란 진리와 이성, 정체성, 그리고 객관성에 관한 전통적인 개념에 관하여, 우주적인 발전이나 해방, 단일한 체계, 거대담론, 그리고 설명을 위한 궁극적인 기초에 관하여 회의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고방식이다. 이 포스트모더니즘의 핵심적 주제는 상대주의와 다원주의이다. 하지만 기독교 설교가 이러한 문화적 다양성과 현실 그리고 복잡한 이해관계에 대해서 그 목표를 제대로 달성하기란 불가능해 보인다. 그렇다면 오늘날 설교자들은 포스트모더니즘의 시대정신을 어떻게 평가해야하는가? 간략히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포스트모더니즘은 하나의 시대사조로 설교와 관련해서 더욱 풍요롭게 하거나 반대로 장애물이 될 가능성이 있다. 즉, 설교학 입장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현상을 무조건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지도 말아야 하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배격할 필요도 없다. 둘째, 포스트모더니즘은 완전히 새로운 발전이 아닌 하나의 결론 점이다.. 볼프강 벨슈는 :우리의 포스트모던적인 모던주의“라는 표현을 한 것처럼 두 시대사조는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다. 셋째, 포스트모더니즘은 혁명이 아닌 반복이라는 것이다. 우리는 포스트모더니즘과 모더니즘의 영향에 함께 머물러 있을지도 모른다. 이러한 평가들은 우리가 최선의 선택을 내림에 있어서 시대 분별에 대한 객관성과 분별력을 요구한다.
다음으로 커뮤니케이션과 과학분야에서는 전통적인 설교가 완전히 시대착오적인 유물과 같이 지나간 시대를 대변한다고 이야기한다. 현대사회는 수많은 이미지에 노출되고 이러한 이미지 문명시대가 책 문화를 빠르게 잠식하고 있다. 이로 인해 원고 출판의 시대가 상상의 시대로 바뀌고 아이콘이 개념을 대체하고 이미지들이 단어를 대체하고 있다. 이를 설교에 적용해본다면 전통적 설교는 완전히 효과를 얻지 못하는 것은 아니지만 오늘날의 커뮤니케이션 과학의 관점에서 제기되는 비평적인 견해에 따르면 설교의 전반적인 틀이 극적으로 바뀌고 특히 상상력을 활용하는 방식으로 바뀌어야 할 때가 되었다는 것이다. 오늘날의 설교는 일반 대중을 향한 호소력을 잃어가고 있으며, 획일적이고 지루하고, 설교가 설교자 개인의 사유재산처럼 변질되고 있다.
신학적인 관점에서는 “제도적으로 보장된 진부함”이라던가, 오늘날에도 설교가 그 정당성을 인정받을 수 있는가, 복음 자체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실패한 소통의 전형이지 않은가? 와 같은 비판을 받고 있다.
회중석에서는 속전속결과 즉각적인 소통의 시대에 어울리는 속전속결 복음을 원하거나 현재 교회가 제공하는 것 이외의 다른 어떤 것을 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상당수의 신자가 교회에 대한 환상에서 벗어나고 자신들의 일상생활과 아무런 관련이 없으며 목회자는 청중을 마치 영적인 어린아이 취급을 하거나 때로는 과대평가하여 비현실적인 종교적인 용어나 그럴싸한 예화로 화나게 만들기도 한다. 마치 다음과 같은 한마디로 오늘날 사람들이 느끼는 설교에 대한 분개를 표현할 수 있다. “엄마! 이제 저 남자에게 돈을 쥐어주고 빨리 나가자!”
하지만 설교는 여전히 회중 안에서 회중을 통하여 목회 사역을 성취하는데 중요한 기능을 감당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교회의 심장과 같이). 설교는 교회 회중의 훈육에 기본적이고 중심적이며, 평범한 텍스트가 아닌 하나님이 행하신 것에 대한 성경적 증언과 오늘날 하나님이 우리 가운데 행하고 계시는 구원을 연결하는 연결고리이다.. 또한 오늘날 교회에서의 설교는 교회의 건강상태를 보여주는 일종의 진열창과 같이 “설교한 대로 교회가 세워지고, 교회의 모습 그대로 설교가 전해진다.”고도 할 수 있다. 또한 설교는 소망의 행위로 우리가 참여하는 교회활동 중에서 가장 희망찬 행위라고 생각될 수 있다. 다시 말하면 설교는 결과가 없는 현실에 선포되며, 무기력함에도 강력한 힘에 대항하여 선포되며 불굴의 희망에 대한 선포로 더욱 힘차게 만들어 준다. 그 소망에 대해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설교는 분명 사람을 바꿀 수 있다. 교회의 역사를 살펴볼 때 설교를 통한 사람의 변화는 분명히 나타나고 이는 부정할 수 없다. 둘째, 설교는 결코 사람의 공허한 말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임재하시고 말씀하시는 말씀 사건이다. 설교를 통해서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 사건의 그 해답을 발견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희망찬 설교 안에는 반드시 기도가 바탕이 되어야 한다. 셋째, 설교는 그리스도의 신비의 계시에 기여할 수 있다. 마틴 루터는 예수 그리스도만을 설교한다고 말할 때, 그 역시 설교자의 모든 관심사가 그리스도에게로 집중되며 그로부터 모든 진리의 빛이 흘러나옴을 암시했다. 즉, 이 말에 그리스도의 임재와 선포에 대한 희망찬 설교의 본질이 담겨있는 것이다. 오늘날 기독교 설교자들은 조롱받고 배척받기도 하지만 우리는 이 세상을 뒤바꿀 말씀을 위임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어야 한다..
< 제 2장 > 설교의 신비 : 강단에서 합류하는 음성들
설교에는 네 가지의 핵심 요소가 존재한다. 첫째, 설교를 통해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타나야 한다. 둘째는 성경이다. 설교를 통해서 증언되는 분은 곧 성경이 증언하는 예수 그리스도 이시다. 셋째는 회중이다. 설교자는 회중들과의 소통을 통해서 그리스도에 관한 말씀이 곧 그 비전이 되도록 중재하는 역할을 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그리스도에 관한 청취가 청중 스스로의 삶에 이해되는 그리스도에 관한 목격으로 바뀌고 그들의 필요와 위기의 상황이라는 특정한 상황 속에서 영향을 미치게 된다. 넷째는 설교자 자신이다. 설교자는 그리스도를 가리키는 지시자요 중재자로서의 역할을 감당해야 한다. 설교의 기적은 이 네 가지 요소가 성령의 역사를 통해 우리가 설교라고 부르는 것의 약속과 도전이 자리하고 신비로운 기적이 발생한다.
설교에 있어서는 손쉬운 조리법이란 있을 수 없다. 설교는 설교자의 음성과 성경본문, 회중(상황), 하나님의 음성 이 네 가지 음성들이 언어의 시냇물을 이루어 흘러가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설교자들은 어떻게 이 네 가지 요소들을 신학적이고 정당한 방식으로 통일성을 이뤄낼 수 있을까. 이는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할 수 있다. 첫 째는 성령의 은사에 의한 네 음성의 일치이다. 의심할 여지가 없이 설교의 신비는 성령 하나님의 역사에 달려 있으며 이는 곧 성령론적인 신비라고 표현할 수 있다. 두 번째는 신학적인 분열로서의 대도적인 음성들이다. 우리는 설교를 구성하는 구성요소들의 극단적인 대척점을 주목한다면 설교의 신비를 좀 더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에서 네 음성의 분열이 발생하는 경우는 설교자가 자신의 목소리에 애착을 가질 때, 그리고 설교가 단순히 성경 본문에 대한 정확한 주해에 집착할 때, 설교에 회중의 상황이나 음성이 제외되는 경우, 설교자가 하나님의 음성을 인간적인 상황이나 배경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마치 하늘에서 직통으로 떨어지듯이 제시하는 경우이다. 세 번째는 역동적인 현상으로서의 음성이다. 설교에서 합류하는 네 가지 음성의 역동적인 관계와 그 우선순위를 앎으로써 하나님이 살아계신 분으로 성경 본문을 통해 말씀하시며 이때 설교자와 본문, 그리고 회중과의 상호적인 대화가 없이는 궁극적으로 그분의 음성을 들을 수 없다는 것이다.
설교의 네 가지 음성의 상호 관계를 “놀이(play)”라는 개념으로 이해해 볼 수 있다. 설교를 놀이로 설명하려는 은유에 대한 심원한 동기는 하나님의 창조와 재창조의 행위 속에서 알 수 있으며, 하나님이 오직 자신의 기쁨을 위해 만물을 창조하였고, 우리의 최고 소명은 그분을 영원토록 즐거워하며 그분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라는 것이다. 저명한 설교학자 루돌프 보렌은 설교를 가리켜 거룩한 놀이라고 표현했다. 놀이를 하기 위해서는 놀이터가 필요하며 이 놀이터는 설교의 네 가지 요소가 만나는 장소라고 생각할 수 있겠다. 이 장소에서 비로소 다양하고 조화로운 하나님의 음성이 다음과 같은 네 가지 “신호등”, “깃대” 사이의 상호작용 하는 놀이를 통해 들려지기 시작한다. 우리가 목격하는 첫째 깃발은 하나님 그분의 신비이다. 세 번째 깃발은 성경 본문이다. 본문 말씀을 통해서 우리가 생각하거나 간구하는 것을 훨씬 초월하여 숨이 막힐 정도로 감동적이며 흥미진진한 다양성을 제공한다. 세 번째 깃발은 회중으로 설교자는 청중들의 여러 목소리를 세심하게 경청하고 점검해야 한다.. 청중들이 하나님의 음성을 올바로 듣도록 인도함으로써 설교는 회중과 함께 뛰노는 놀이이다. 또 다른 깃발은 설교자 그 자신이다. 설교자는 창조적인 신앙 공동체가 위치한 특정 자리에서 창조적인 성경 본문의 빛 아래 창조하시는 하나님에 관하여 목격한 것을 증언하는 창조적인 사람들이다. 이들은 본인들의 우월함을 추구하는 거에서 벗어나 미래에 희망이 가득한 상황이 오고 있음을 계속 상기시켜주며 이러한 설교가 결국 하나님을 위하여 가능한 세상을 만드는 설교가 될 수 있을 것이다.
<제 3장> 임재하는 하나님의 음성
우리는 교회에 왜 출석하는가? 그 핵심은 개혁주의 전통에서 하나님과의 만나의 사건이라고 부른다. 이 만남은 우리의 향기가 위로부터 내려 비치는 하나님의 빛과 합류할 때 발생하며, 성경 본문이 이 만남을 해석할 때 발생한다.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하시는 신비를 올바로 인식하고 “두렵고도 황홀한 신비” 앞에 무릎 꿇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바로 교회에 출석하는 이유이며 우리가 열망해야 하는 대상이 된다. 그리고 예배의 모든 요소들 중에서 설교가 반드시 다뤄서 밝혀내야 하는 것도 바로 이것이다. 즉 하나님의 신비로운 임재 앞으로 새롭게 인도를 받아서 두렵고 떨리면서 황홀함으로 그분을 하나님으로 경배하는 것이다.
예배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그분의 임재를 어떻게 인지할 수 있을까 라는 질문에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상황에 대해 생각해봐야 한다.. 첫 번째, 익숙함으로부터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익숙함은 사라지게 된다. 왜냐하면 우리 인간의 손짓이나 요청에 종속되어 움직이는 분이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들이 예배에 대한 기대감을 잃어버리면 예전적인 익숙함이 뒤따르게 된다. 이럴 때 우리는 예배가 여러 일정 들 중 하나로 인식되고 우리는 하나님에 관한 조작으로 혼란에 빠지게 될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예배가 세상의 것들과 어떤 차이가 있는지 망각하게 되며 우리가 알고자 하는 분이 누구이신지 조차 잊어버리게 된다. 사실 “하나님”이라는 단어를 이해해가는 사람이라면 두려워하는 하나님에 대한 경외감의 여지가 만들어지게 된다. 그 경외심은 부정적 두려움이 아닌 존경의 마음이 담긴 경외심이라고 할 수 있다. 두 번째, 형식주의로부터 자유로이 되는 것이다. 여기에서 강조하고자 하는 것은 형식을 지키는 전통은 결코 하나님을 자동적으로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의 임재에 관한 역설은 우리가 형식의 관점에서는 올바를 수 있지만 그 형식 안에서 자유롭지 못하다는 것이다. 하지만 주의 영이 있는 곳에는 자유함이 있다(고후 3:17). 여기에서 말하는 자유란 경외감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갈 자유를 말한다. 자유가 있는 곳에서 하나님은 전심으로 찬송받으시기에 합당하다. 세 번째, 소비자 사고방식에서 기대감으로의 변화에 대한 것이다. 예배는 항상 인간을 향한 하나님의 봉사가 먼저이고, 우리가 그분을 섬기기 이전에 먼저 그분의 우리를 향한 자비로운 접근이 먼저이다. 하나님의 임재는 사람의 힘으로 만들 수 없고 예배로 보장할 수도 없다. 하나님은 다만 스스로 나타나시며 스스로 자신을 계시할 뿐이다. 그래서 기독교 예배는 소비자 사고방식에 맞지 않다. 예배는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지 않는다. 우리와 같은 사람의 책임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예배 인도를 맡은 우리는 올바른 예배를 위해 최선을 다하고 하나님의 임재를 방해하는 요소를 제거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임재는 쉽게 방해되기 때문이다.
예배는 인도자로 인해 또는 회중의 기대감에 따라 무너질 수 있다. 예를 들어 두 장소에서 동시에 같은 예배가 드려지더라도 한쪽은 주님 임재에 기대가 가득하고, 한 곳은 영적으로 침체될 수 있다. 예민한 부분이지만 이 차이는 인도자의 방식이 회중의 마음속에 주님에 대한 영적인 민감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인도자의 작은 행동이나 목소리, 자세 찬양 방식 등에 의해 모든 것이 달라질 수 있다. 주님의 임재에 대한 기대감이 가득 담긴 예배는 인도자와 회중 모두가 임재의 순간을 향해 열려있으며 그분의 임재로 마음이 뜨거워짐을 경험할 수 있을 것이다. 바로 그때 “하나님이 정녕 너희 가운데 계시도다.“라고 이방인들이 인정하고, 회중들은 우리가 결코 혼자가 아님을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지금까지의 내용에 다르면 설교자는 성경 본문이 아닌 하나님을 선포하고, 설교에서 하나님이 직접 그분의 “살아 있는 복음의 음성“ 으로서의 하나님이 나타나도록 해야 한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하나님이 설교자를 통하여 직접 말씀하시도록 할 수 있는 것인가? 이 질문에 대해서는 논리적인 대답보다는 신학적인 대답만이 가능하다. 설교는 앞서 계시된 것들을 다시 드러나는 분의 신비에 관한 것이다. 이에 대해 다음과 같은 다섯 가지 설명을 알아보고자 한다. 먼저 우리는 하나님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선포하는 설교로 성경본문을 그저 역사의 관점에서만 해석하는 것이 아닌 하나님이 과거에도 계셨고, 현재에도 계시며 미래에도 오실 것임을 확증하는 설교를 통해 소망과 기대 속에서 그 임재를 지시하고 증언할 뿐이다. 두 번째로 설교하는 것은 어느 날 갑자기 불타는 떨기나무 곁에 서 있는 자신을 발견하는 것 (출 3장)으로 그때 우리는 신발을 벗어야 하며 자신이 지금 거룩한 자리에 서 있음을 깨달아야 한다. 설교자로서 우리는 청중과 함께 하나님의 신비 앞에 무릎을 꿇고 우리에게 새로운 감동을 허락해 주실 것이라는 기대감을 가지고 그 앞에 나아가야 한다. 세 번째로 하나님에 대해 이야기하기 위해서 절대적 확실성과 불굴의 견고함과는 다른 차원의 차별성이 요구된다.
설교자들이 본능적으로 하나님의 신비를 제거하여 그분을 통제하려 하는 무모한 모습을 보이는 경우도 있지만 하나님은 결코 사람들에 의해 통제될 수 없는 분이시다. 오히려 그 안에서 하나님의 신비 가운데 경외감이 깊어지는 역사가 일어날 것이다. 다음 네 번째로 미스코테에 의하면 좋은 설교란 ”방주를 가린 커튼을 걷어내는 것“이라고 표현했다. 커튼은 이미 그리스도의 대속 사역으로 인해 중간 부분이 위에서부터 아래로 찢기고 벗겨졌다(마 15:38). 하나님이 이미 장막을 제거해 주셨다(고후 3:14-18). 하지만 우리는 아직도 무지와 불신의 장막이 덮여 있어서 이를 설교를 통해 반복적으로 제거하여 지극히 거룩하신 분을 바라볼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복음을 의지하며 그 어떠한 것도 더하지 말고 전심으로 신뢰해야 한다는 것이다.
설교와 예배의 모든 것은 우리에게 찾아오시는 하나님에게 달려있으며, 그리스도께서 친히 우리에게 말씀하시며 그 말씀 속에서 우리를 구원하신다는 점이다.
이어서 구원 설교에 대해서 알아보고자 한다. 구원 설교는 복음의 기쁜 소식을 알려주는 언어의 표지들이 발견된다. 구원 설교의 다음 여섯 가지 특징을 알아보자. 먼저 하나님은 자신을 삼위일체로 계시하시고, 설교는 항상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실체를 선포하는 것이다. 또한 그 모든 흐름은 결국 그리스도에게 집약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오직 그리스도만 선포하면서 삼위일체적인 설교를 할 수 있을까? 우리는 삼우 일체의 구속 사역에 관한 통전적인 신학의 관점을 구비할 때 비로소 기독론적인 설교를 감당할 수 있다. 하나님의 구원 사역의 가장 심오한 지점은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되며, 성경을 통해서 계시된 바와 같이 구원 설교는 어떤 식으로든 그리스도에게서 그 정점에 도달해야 한다고 말할 수 있다. 특히 이러한 점은 구약성경에서 중요한데 다음으로 구약성경 본문의 독특성을 제대로 부각하지 않고 그리스도 뒤로 사라져 버리는 통과 불가능한 여러 깊은 구멍들을 이 존재한다. 구약 본문에 대한 기독론적인 편협성은 구약성경을 신약의 예언으로만 간주하게 된다. 이런 경우에는 구원의 메시지에 대한 신학적 깊이가 사라지고 예수 찬사가 본문에 담긴 적법한 기독론적인 가능성을 짓눌러버린다. 이외에도 구약 본문에 대한 기독론적 확대, 기독론적 분리가 있다.
우리는 구원 설교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임하는 말씀이며, 이를 통해 죽은 교회를 세우고, 말씀 안에서 우리는 새로운 백성을 변화됨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설교자는 단순한 메시지나, 본문을 설교하는 것이 아닌 인격이신 예수 그리스도 그분을 설교해야 한다. 구원 설교는 항상 시간을 지향하고, 구원 설교는 항상 그 설교를 듣는 특정한 청중을 지향한다. 이때 복음은 과거 예수의 복음사역과 마찬가지로 특정 시간과 장소나 상황에 적합해야 한다.
하나님의 구원은 역사 속에서 실현되었으며 그 구원 역사에 관한 설교를 통해서 다시 실현된다. 즉 하지만 사람들을 “내러티브 설교”에 대해 몇 가지 다른 차원의 생각을 갖는 경우가 있다. 첫 번째, 이야기가 듣기 좋다는 이유로 설교 시간에 여러 이야기들을 들려준다. 두 번째, 성경의 이야기를 현대적으로 재 진술하여 역사적 자료와 상황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이야기에 담긴 일반적인 흐름이 그대로 전달될 수 있다. 세 번째, 현대적인 이야기를 들려주는 것으로 특정 본문 내용을 각색하여 전달하는 방식이 이다. 네 번째, 설교가 예수에 관한 마스터 내러티브를 재진술 하는 설교를 위한 독특한 출발점을 제공한다. 사람의 입에서 예수의 마스터 내러티브를 전달하기 위해 이를 가슴 깊숙이 이해하고 있어야 한다. 설교자들은 생명이 없는 존재가 아닌 하나님의 은혜로 구속의 역사를 체험하고 그 속을 살아가기 때문에 설교에서 그 구원을 반영시킬 수 있어야 한다. 설교자는 계속해서 언젠가는 하나님의 은혜로 참된 설교를 감당할 날이 올 것을 소망하며 꾸준히 노력해야 한다. 우리는 그분이 임재하시기를 원하고 희망해야 한다. 성경 내러티브의 핵심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에 진행되는 우주적인 드라마의 핵심은 임마누엘로 집약된다는 것이다. 우리는 설교 안에서 하나님이 제거되지 않도록 주의하고, 임재하여 계신 하나님의 임재를 분간하도록 안내할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잘못된 지점에서 하나님을 제대로 바라보고는 있는지 고민해 봐야 한다.
안타깝게도 오늘날 많은 설교자는 구원의 복음을 설교하기보단 복음을 도덕으로 바꾸어 개인의 개선이 나타나도록 호소하는 도덕적인 접근을 취하고 있다. 또한 표면적으로만 기독론적인 공식 문구들은 설교의 전체 구조 안에서는 일종의 상투적인 표현으로나 이상한 모습으로 본래의 내용과 영향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 하지만 복음은 공식 문구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 권능으로 임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율법주의의 기본 구조는 다음과 같다. (과거에) 하나님이 역사하셨고, (장래에) 하나님이 역사하시기를 원하시거나 역사하실 것이며, (현재에) 이를 위하여 우리가 어떤 것을 해야 한다. 하지만 이러한 설교는 청중의 행동으로 인한 결과에 따라 하나님의 뜻이 달라지며 자칫하면 율법주의와 인본주의의 함정에 빠지게 되는 결과를 초래할 수 있게 된다. 즉, 사람의 행동으로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닌 하나님의 승리하심과 계시하심은 하나님으로부터 나타나게 된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또한 설교에서는 하나님의 이미지를 보여줌에 있어서 항상 신중해야 하고 인본주의적인 설교를 통해서 하나님이 무기력한 모습으로, 변방으로 밀려난 모습으로 보이게 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는 설교를 통해 늘 역동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으로 묘사해야 하고 설교가 하나님을 조작하거나 굴복시키지 않는 형태로 나타나야 한다.
<제 4장 > 성경 본문의 음성
설교자가 성경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는 것은 주님의 임재를 바라볼 수 있는 안경을 제공하는 사건이다. 설교자들은 이 안경을 통해 성경의 본질과 기능, 기적과 충만함, 다차원 성을 올바로 이해할 필요가 있다. 성경은 다양한 방법으로 하나님의 목격담을 설명하고 우리를 경탄하게 만든다. 다시 말하면, 이전의 보지 못한 것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고정관념이나 절대적이고 변함없는 확실성에 얽매일 수 없다. 그래서 철저하게 다른 하나님에 관하여 증언하는 성경본문은 전혀 거리낌 없이 우리의 상식과 완전히 배치되거나 심지어 비논리적으로 하나님에 관하여 증언한다. 우리는 정해진 설교 방법에 하나님을 끼워 맞춤으로 하나님의 음성을 축소시키지 않도록 해야 한다.
설교를 한다는 것은 본문이 지시하는 새로운 상상을 얻는 것이고, 그 세상이 우리의 세상이 되도록 하는 것이며, 본문의 장엄한 안경을 통해서 청중이 이전에 놓친 것들을 새롭게 바라보도록 안내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나라는 이와 같다 = 창조하는 같음) 이렇게 상상 가득한 방법으로 본문과 관계를 맺기 위해서는 성경 본문을 철저하고도 깊게 들여다본 사람만이 그 안에서 자유를 얻는다. 또한 성경은 인간의 말로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이며 성경책 자체가 하나님도 아니고 그분의 정확한 계시도 아니다. 그래서 예배 시간에 성경이 경배할 대상이 되어서는 안 된다. 성경의 인간적인 속성으로 우리 마음이 자유롭고 위로가 되는 것은 하나님이 온 세상을 향해 하늘에서 모두에게 소리치신 것이 아닌 사람의 말을 통해서 우리에게 오신다는 사실이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으로 기록된 하나님의 말씀이야 말로 성육신하신 말씀만큼이나 위대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설교에서는 비인간적이고 비현실적인 말만 가득해서는 안 된다. 왜냐하면 우리에게 찾아오신 하나님의 성육신과 우리의 수용능력에 맞추신 하나님의 적응은 참으로 위대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육신의 동기로 돌아가 본다면 그리스도를 참 하나님과 참사람이라고 표현하는데, 우리도 마찬가지로 성경에 대하여 참으로 신성하고 참으로 인간적인 책이라고 할 수 있겠다. 성경의 신성한 차원과 인간적인 차원들 대립시키면 그 메시지는 어느 한쪽으로 치우쳐져 성경의 독특한 음성을 듣지 못하게 할 것이다. 이 성경의 독특한 음성을 듣기 위해서는 본문을 성실하게 해석해야 한다. 여기에서 성경의 메시지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구속 행위에 관한 것이라는 것이다. 성경의 네 가지 속성은 다음과 같다. 첫째, 성경은 하나님의 권위 있는 말씀이다. 둘째, 이 세상 어디에서나 그 어떤 책에서 하나님의 자비로우신 구원에 관한 메시지는 들을 수 없다. 셋째, 성경은 자명하고 분명하다. 넷째, 성경은 충분하고 완벽하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경적인 설교를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성경을 신뢰하고, 성경을 존중하며, 성경본문의 의미를 발견하려는 의식적인 집중력과 혼신의 열망을 가져야 한다. 또한 본문을 통해서 자신의 이전 생각이 반복적으로 수정되도록 의지적으로 허락해야 한다. 마지막으로 하나님의 말씀의 능력으로 자신이 감동을 받도록 허락해야 한다. 우리 설교자들은 설교와 예배가 성경 본문을 십자가에 못 박아서는 안되며, 설교와 예배를 관통하도록 해야 한다는 것이다.
창조적인 설교를 위해서는 다음과 같은 쟁점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설교자들은 본문이 지향하는 근원적인 코드에 집중해야 하고, 성경에서 단순히 도덕과 윤리를 전달하는 명령문이 아닌 하나님의 실제 세계를 재 진술하는 방편으로 기능하는 은유 언어의 역할게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또한 본문의 방향과 궤적에 관심을 기울이고, 목표의 의도를 그대로 실행하도록 노력해야 한다. 설교자들은 성경 본문의 사회학적인 해석에 주의를 기울이고, 본문의 특정한 역사적, 문학적, 지리적, 사회경제적 상황에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그리고 무미건조한 적용점보다는 본문의 적용 가능성과 관련된 상상이 담긴 기대감을 고취시키도록 노력해야 한다.
< 제5장 > 회중의 음성
바람직한 설교를 위해서는 설교자가 청중에 관한 건강한 신학적 전망을 갖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성경 본문은 설교자의 개인적인 소유가 아닌 회중 전체에게 속한 것이기 때문에, 모든 회중이 “우리가 하나님 음성을 들었노라.”라고 동의할 때까지 모든 각도에서 점검하여 들어본 사람에게서 그런 사람들에게로 전달되어야 한다. 설교의 비밀은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음성과 성경본문의 음성의 일치와 조화에 있다. 하지만 이 것뿐만 아니라 설교자가 회중의 음성을 듣는 방식과도 관련이 있다. 설교는 회중을 향해 선포되지만, 회중으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다시 말하면 설교자는 주해 자이며, 선포자로서의 설교자 특권이 회중 전체를 포함하기에 충분하도록 확장되어야 한다.
본문 내용이 상대주의로 귀결되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성경의 기초 본문의 일관성 속에서 해석되어야 한다. 그렇다면 성경의 기초 본문이 무엇인지는 누가 결정하는가? 그것은 목회자와 신학자들과 같은 개인 주해자들이다. 교회일치의 해석학에서는 자신의 해석이 다른 사람들의 해석을 침해하지 않도록 하고, 자신은 다른 사람들의 관점에 귀를 열어두고, 충돌할 때면 자신의 견해를 기꺼이 수정할 수 있어야 한다. 회중은 진리의 담지자이자 보호자이다(딤 3:15). 다시 말하면 설교 준비과정은 설교 준비부터 전달까지 그리고 설교의 후속 파장에 이르기까지 항상 원칙적으로는 회중과 함께 결정되어야 한다. 설교자와 회중의 관계에 대한 논의는 칼 바르트가 제시한 다섯 가지 철학적 범주로 생각해 볼 수 있다. 첫째, 설교자는 자신의 설교를 듣는 회중을 사랑해야 하며 그들의 일부가 되어야 한다. 둘째, 설교자는 회중을 사랑하기 때문에 그들의 삶과 생애도 그 수준대로 사랑해야 한다. 셋째, 설교 메시지가 다른 메시지들보다 인생의 의미에 관하여 더 명쾌하고 더 충분한 해설을 담고 있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이것이 중요하지 않다는 것은 아니지만 설교는 그보다 인생의 의미를 하나님의 계시의 빛 아래 조명할 수 있어야 한다. 넷째, 설교에는 재치가 있고 적절함이 있어야 한다. 다섯째, 설교한다는 것은 설교자와 회중의 시간에 대하여 이해하고 그 만남의 순간을 인식하는 것이다. 이 점을 잘 이해한다면 회중과의 연관성을 잃어버린 주제를 이야기하는 실수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다. 설교에서 설교자의 적당한 카리스마를 발휘하는 것도 좋지만, 성령께서 회중 전체에게 부어주신 은사가 더 낫다.
설교자는 청중과 그들의 상황에 관한 이해는 설교가 고유하면서도 상황에 적실하게 선포될 수 있는 토대를 제공한다. 그렇다면 말씀의 상황화가 어떻게 일어나는가?라는 질문에 대해서 성경은 좋은 선례를 제시한다. 성경은 항상 상황 속에 뿌리내린 말씀이고 특정한 시공간에 성육한 말씀이며, 역사인 동시에 동시대 적이다. 복음의 상황화는 신학적인 성숙과 예민함을 요구하며, 설교자가 오직 복음만을 그대로 상황에 부합하게 적용할 것을 요구한다. 설교의 상황화를 위해 다음의 윤곽이 중요하다. 설교가 성경의 언어를 오늘의 상황에 맞게 반복적으로 재 진술하는 것이 필수적이다. 또한 설교의 형식을 계속해서 재고해야 하는 상황적인 설교의 본질에 속한다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상황화는 설교자와 청중의 해석 기술에 관한 것으로 만약 원칙적으로 해석학적으로 사고하지 않으면 상황화 할 수 없을 것이다.
세 가지 해석학 전통으로는 성육신과 재해석, 변혁이라는 신학적 전통 안에서 이해하여 계발할 수 있다. 성육신의 관점에서 볼 때 설교자들은 각각의 시대를 심각하게 접근해야 만 했다. 그리스도의 성육신은 하나님이 사람들의 수준에 자신을 적용시키는 그분의 사역 방식과, 계시에 동반되는 성령의 역사, 우리 육신의 실존 속으로 낮아지심, 그리고 자신을 죽음에 내어주신 자기 비하를 강조한다(빌 2:6-8). 재해석에 대해서는 예수께서 자기 시대의 전통을 잘 이해했을 뿐만 아니라 그 전통을 자신의 주도적인 행동의 관점 아래 상대화시키고 급진적으로 개혁하였다는 것이다. 설교의 임무는 시대의 정신을 하나님 나라의 관점에서 계속 재해석하고, 참으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는 것이다. 다음으로 변혁이라는 점에서는 우리가 복음의 설교자로서 실재는 아직 완성되지 않고 불완전하고 끝이 열려 있다는 가정 위에 서있다. 그 안에서 설교는 역사와 실재 속에서 이어지는 모방 거리가 아님을 기억하고, 재림의 관점에서 실재를 상대화하며 마지막 변혁에 대한 희망 속에서 그리고 반복되는 해석 작업 속에서 실재와 계속 성육신적으로 투쟁하는 것이다.
< 제 6장 > 설교자의 음성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보다도 선포된 말씀이고 행위적인 사건이며 진정 다바르(창조하는 사건)이다. 기독교 예배에서는 다른 수행자가 준비된 설교를 대신할 수 없다. 음성의 부재, 즉 한 설교자의 인격의 부재는 인격으로서의 설교의 본질에 해를 가져오고, 결국 인격적인 표현과 하나님의 음성의 해설로서의 설교 본질을 침해한다. 영상이나 매체를 통해서 예배를 드리는 것도 좋아 보일지 모르지만, 설교에 본질에 해당되는 설교자의 인격과 회중과의 소통이 빠져있다. 그래서 복음은 사람의 입을 통해서 설교로 선포되어야 한다.
설교자의 음성은 설교자의 신체적 목소리뿐만 아니라 인간성을 포함하는 의미로 생각해야 한다. 설교단은 겸손한 메신저 혹은 매혹적인 이야기꾼의 자리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존재하는 한 사람 그 자체이다. 필립 브룩스에 의하면 “설교는 인격을 통한 하나님의 진리의 소통이다.”와 같은 고전적 정의를 내렸다. 설교자는 교만해서는 안되며 위대한 나인 하나님께 봉사하고 매일 지속적으로 자신의 허영심으로부터 떠나는 회개가 필요하다. 설교자가 꼭 기억해야 할 점은 나의 성공이 복음의 성공과 동의어는 아니란 사실이다. 설교자가 되는 것은 성숙한 겸손의 경지에 도달하여 신학적으로 성숙해지는 것이다. 신학적인 훈련을 이 땅에서 완료할 수 없고 지속적으로 지혜 속에서 매일 계속 자라가야 한다. 설교에서 겸손을 강조한다고 해서 설교자의 권위를 약화시키는 것은 결코 아니며 설교에 성령 하나님이 개입하실 때 그분은 우리 설교자를 설교에 적극적으로 끌어들이심을 알아야 한다.
설교는 단순한 지식의 전달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로부터 파생되고, 본문 안에서의 하나님과의 만남의 경험에서 파생된 말씀을 전달하는 것이다. 설교자의 역할과 설교자의 가면은 어떤 식으로든 생겨날 수 없으며 결국에는 드러나기 마련이다. 본문 메시지에 대해 충분히 연구하지 않고 강단에 올라간다면 본문을 설명하는 데 있어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설교자로서 본인의 역할을 제대로 감당하는데 매우 중요한 관계를 갖고 있다. 그 관계란 하나님과의 관계와 아울러 하나님과의 기 내면세계와의 관계, 회중과의 관계를 맺고 있다. 이 다차원적 관계에서 진정성을 갖지 않는 사람은 설교자로서 말씀을 설교할 권리도 없다. 이런 점에서 청중이 강단에서 듣는 메시지는 설교자의 영성이라고 할 수 있다. 영성이란 성령을 통하여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도록 부름 받은 자신의 소명의 관점을 가지고 다차원적 관계를 맺고 있는 목회자의 모든 삶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성에 관하여 논의한다면 기도의 중요성을 빠트려서는 안 된다. 설교에서 매우 중요한 요소이며 설교는 무엇보다도 기도이고 어떤 식으로든 기도와 분리될 수 없다. 이 기도로 무장된 영성이 앞에서 논의한 설교의 음성을 조절한다고 할 수 있다. 설교한다는 것은 곧 기도한다는 것으로 표현되기도 한다. 우리의 설교단은 설교단인 동시에 기도용 의자여야 한다.
어떤 의미에서는 설교자가 무엇을 말하는가 보다 설교자가 어떤 사람인가가 더 중요하다. 철학적으로는 사람의 행동은 그 사람의 존재로부터 흘러나온다고 이야기한다. 그렇기 때문에 설교자의 중요성에 대하여 계속해서 강조하는 것이다. 우리는 기도한 그대로 신앙을 고백하고 그대로 살아가고 그대로 설교한다. 루터에 따르면 설교자의 훈련은 세 가지 기본적인 요소가 필요하다고 한다. 그것은 바로 기도와 묵상 그리고 시련이다. 칼 바르트는 설교와 관련해 던져볼 가장 중요한 질문은 “우리가 설교를 어떻게 준비해야 하는가?”가 아닌 “어떻게 우리가 감히 설교를 준비할 수 있는가?”이다. 이러한 이유로 설교자들은 설교의 방법론이 아닌 설교의 기적과 하나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향한 기도에 집중해야 한다. 비록 우리가 성령 하나님을 통제하거나 잡아가 둘 수 없지만, 그분은 여전히 우리 안에 내주 하러 오셨다. 우리의 설교 방법론에 자유를 허락하셔서 오늘날 설교 역시 다양한 목소리와 다채로운 특성을 갖는다. 또 다른 한편으로는 성령의 자유로운 역사는 설교 방법론의 창조성을 암시한다. 즉 모든 방법론을 시도해 볼 수 있는 것이다.
창조성은 기존 요소들에 대한 혁신적인 조합이나 연합을 발생시켜 실천적인 적용이 이뤄지는 과정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는 우발적으로 발생하기도 하며, 학습을 필요로 하기도 한다. 설교하는 것은 매우 창조적인 행위이고 설교시간에 설교자는 본문에 기초하여 좀 더 새롭고, 좀 더 신난 것, 때로는 회중을 불편하게 할 메시지를 말해서 회중이 받아들이도록 해야 한다. 이러한 창조성을 발휘하는 단계는 기초적인 토대(준비), 발전(배양), 설명(조명), 형성(확증)이다. 설교 생산의 첫 단계는 준비로 설교에서 다룰 본문을 준비하고 연구하고 수집한다. 그리고 회중과 관련된 모든 통찰들과, 방해가 될 사항도 미리 고려해야 한다. 두 번째 단계는 발전으로 설교자는 준비단계에서 수집된 정보를 해결점으로 옮겨가며 정리해 나가야 한다. 그 과정 안에서 수면은 중요한 부분이다. 설교의 세 번째 단계는 설명이다. 설명 단계는 우리 설교자들의 영안이 밝아져서(엡 1:18) 세상과 회중을 특정한 선경 본문의 전망을 통해서 바라보는 “예언의 단계”라고도 불릴 수 있다. 이 단계에서는 비전이 펼쳐지고 하나님과 세상을 향한 창문이 이전보다 더욱 선명해진다. 네 번째 단계는 형성이다. 설명 단계는 본문과 이 세상 사이의 교량을 발전하는 것이라면, 형성 단계는 이 교량을 실제로 구축하여 본문과 세상 사이를 오가는 교통이 실제로 가능하도록 하는 것이다. 이러한 창조적인 설교 안에는 하나님이 결정적인 역할을 감당하신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 설교자들은 기본적인 이미지들, 또는 우리 사회의 이미지들과 연결시키고 우리가 사는 세상의 이미지들과 연결시키는 복음의 이미지들에 관심을 가지고 성겨에 접근해야 한다. 설교자들은 성경의 은유와 우리 일상의 실재에 관한 은유 사이를 중재하며 유익한 은유를 다질 수 있는 방법을 찾는 중재자들이다.
우리는 마틴 루터가 종종 반복하곤 했던 다음의 고백을 기억해야 한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만을 설교하라.’
바로 여기에 교회의 정체성이 담겨 있으며 우리의 참모습은 오직 주님을 가리키는 손가락이요 증인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참모습이다. 우리는 어느 곳에 있든 이 말씀을 선포해야 한다.
‘보라! 세상 죄를 지고 가는 하나님의 어린양 이로다.’
우리의 손과 손가락으로 그리고 우리의 입을 열어 이렇게 살아 계신 복음의 음성을 선포해야 한다.
책을 다 읽고 나서야 비로소 ‘설교 심포니’라는 책의 제목을 이해하게 되었다. 이 한 단어로 완전하게 이해될 수 없지만, 저자가 설명하고자 하는 것이 어떤 것인지 명확하게 정리될 수 있었다. 책을 읽고 책 제목을 풀어 다음과 같이 이 책을 설명해 보고 싶다.
“ 설교 심포니란 하나님이라는 마에스트로의 지휘 아래, 성경이라는 악보를 보고, 설교자라는 솔리스트의 연주와, 회중이라는 관람객의 기립박수로 구성된
경이로운 하나님의 놀이(play)이자 공연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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