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서론
진화론과 창조론 이 두 가지 이론의 길고 긴 학자들의 갑론을박 그리고 대립은 신앙심을 가지고 교회를 다니는 사람에게도 그리고 교회를 다니지 않는 무신론자에게도 논쟁의 여지가 있는 주제이다. 실제로 나는 생물학이라는 전공을 대학교 4년 내내 배웠고, 대학원에서는 미생물을 소재로 한 연구를 2년간 배우며 얕은 수준이지만 과학이라는 학문을 접하게 되었다.
대학원 생활을 하던 중 한 선배는 내가 기독교이며 교회를 열심히 다닌다는 이유로 계속해서 나에게 질문을 했다. “너는 과학을 하는 사람으로써 창조론과 진화론 중에 어떤 것이 맞다고 생각해?”라던가 “유신 진화론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해?”와 같은 질문이었다. 그 당시 나의 대답은 이러했다. “우리는 진화론을 배우고 인간이 된 과정에 대해서 현대에 가장 지지받는 가설 중 하나임에는 분명하지만, 반면에 파스퇴르가 백조목 플라스크 실험으로 자연발생설이 사실이 아님을 입증한 실험(자연속생설)도 존재하니까 제가 이 주제에 대해서 이것이 분명하다고 말할 만큼 간단한 이야기가 아닌 것 같아 저도 어렵네요”였다. 아마도 이것은 과학을 공부하는 기독교인이 할 수 있는 답변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 지금 생각해 보면 이 대답은 창조론과 진화론에 중립적인 태도이면서 어떻게 보면 어떤 것이 진리라고도 말하지 못하고 회피한 대답이였던 것 같다.
성경이 진리의 말씀이며 정확무오한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해본 적은 없지만 이에 반하는 진화론이나 이와 유사하게 진화론을 바탕으로한 유신진화론에 대해서 나는 어째서 부정하지 못하였는가? 분명한 것은 이 책을 통해 그러한 질문을 하는 사람에게 어떻게 답변할 것인가에 대해서 조금은 해답을 얻을 수 있었다. 진화론과, 특히 진화를 통해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셨다는 이론인 유신 진화론은 성경 말씀의 절대적 권위를 인정하지 못하는 행위임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유신진화론 비판은 상권, 하권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 글에 담겨진 부분은 유신진화론 하권에 대한 내용입니다.
2) 본론
유신 진화론자들의 주장을 살펴보면 상당히 그럴듯하다. 하나님은 자연과 우주를 만드시고 자연과 우주 스스로 자신의 조직화 원리에 따라서 생명체를 만들어내는 과정이 바로 그들이 주장하는 자연의 진화에 의한 창조이다. 즉 하나님께서 자연을 만드시고 그 자연이 진화의 과정을 통해 생명체, 곧 인간을 만들어 냈다는 것이다. 이 책에서 이러한 입장에 대해서 진화라는 것은 ‘우연적’으로 일어나는 것임을 이야기하며 유신진화론의 우연성의 문제에 대해서 설명한다.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은 신이 진화 과정을 인도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대표적으로 슐로스와 머레이는 진화의 역사가 하나의 궤적을 보여준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이에 대해서 과연 진화의 과정이 하나님의 인도하심 가운데 있었는가에 대한 이야기를 생각을 해보게 되었다.
‘우연’이라는 말의 사전적 정의는 아무런 인과 관계가 없이 뜻하지 아니하게 일어난 일. 즉 말 그대로 어떠한 선후 관계, 인연, 특징이 없었음에도 일어나는 일을 뜻한다. 진화라는 것은 우연적인 것이라고 설명하면서도 성경에 따른 창조는 사실 하나님의 목적과 설계가 필요한 창조라는 것이다. 우리가 주목해야 할 사실은 자연의 원리는 우연적인 방식, 곧 목적과 계획한 바에 따라 방향 없이 지시된 것이 아닌 방식이라는 것이다. 이에 대해 유신론적 진화론을 신봉하는 사람들은 하나님께서는 전지전능하시기 때문에 그 우연이라는 것에도 관여하시고 그 계획하신 일을 이루실 수 있다고 말한다. 하나님께서 섭리 안에서 우연을 통해 일을 하신다고 생각되어질 수 있지만, 창세기 1장에서 3장에 나오는 창조의 장면은 선언적으로 이루어진 일임을 우리는 분명히 알아야 한다. 구태여 예를 들자면 다음과 같은 일을 생각해 볼 수 있다.
출애굽기에서 모세가 이스라엘 백성을 이끌고 애굽에서 나와 홍해를 건너는 장면을 생각해 보자. 모세가 지팡이를 들자 홍해가 갈라졌고 바다가 벽을 이룬 사건이 있다. 이 사건은 초자연적인 현상이며 이러한 초자연적인 현상의 개입은 그 누구도 우연히 되었다고 이야기하지 못할 것이다.
내가 학교에서 배우기로는 이 세상 최초의 생물은 원핵생물(Prokaryotes)이며 단세포 생물로 진핵생물(Eukaryota)과는 다르게 작은 원형의 DNA를 가지고 있다고 배운다. 이러한 원핵생물들은 유전자의 수평적 이동과 이분법을 통해 무한히 번식한다. 시간이 지나면서 40억년 전에 최초의 진핵생물인 시아노박테리아가 나타났으며 이 지구를 뒤덮은 미생물의 광합성으로 인해 대기에 산소가 형성되게 되어 오늘날의 대기 형태가 되었으며 에너지원의 변화로 인해 원생생물이 사라지거나 산소를 피하는 형태 또는 진핵생물에 공생하면서 생존하는 방법을 선택하여 진화되었고 이러한 유전적 정보가 인간에게도 존재하는 미토콘드리아와 같은 형태로 남게 된 것이라고 배웠다.
이 이야기에 대해서 다시 한번 ‘우연’이라는 것을 대입하여 생각해 본다면, 이 모든 우연이 곧 하나님께서 주관하시고 계획하시고 목적을 이루시기 위해 설계하신 일이라고 한다면 정말 유신론적 진화론자들의 말대로 하나님의 전지전능하심이 너무나도 경이로운 것이라 생각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이 이야기에 대해 서론에 내가 대학원 선배에게 했던 대답들 중 파스퇴르의 생물 속생설을 입증했던 실험을 다시 한번 생각해 보면 위의 최초의 ‘진화 과정’에 주목해야 할 것이 아니라 그 ‘기원’이 과연 어디로부터인가 즉, 원핵 생물은 어떻게 생기게 되었는가를 고민 해야하는 무한한 딜레마에 빠지게 된다. 그 딜레마라는 것은 그 원핵생물을 만들어낸 생물은 무엇인가라는 질문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에 대해서 과연 생명을 창조하시는 것을 ‘우연적’인 진화의 방식으로 뜻하셨는지 아닌지는 성경에서 “말씀으로 지으셨다“라고 선언되고 있는 것(창 1:31, 2:1)을 통해 아니라는 결론을 내릴 수 있다. 또한 마가복음 10장 6절에는 창조 때로부터 사람을 남자와 여자로 지으셨다고 쓰여 있다. 태초로부터 인간을 만드셨고 인간은 죄를 지음으로써 죽음을 맞이하게 된다.
이어서 성경의 핵심은 창조 이후에 사람의 죄와 그에 따른 죽음으로 나타난다. 진화의 과정 속에는 수많은 죽음의 과정이 존재하게 된다. 예를 들면 강한 생물이 살아남고 약한 생물은 죽게 되는 약육강식이나 적자생존 등의 형태로 죽음이 나타난다. 이러한 수많은 죽음을 거쳐 그 진화의 마지막에 인간이 있다고 이야기하는 것이다. 하지만 성경에 의하면 인간이 먼저 창조되었고 죄를 지음으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유신론적 진화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의 죽음에 대한 관점은 성경에서 말하는 것과 반대되는 순서로 나타난다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성서는 세상의 창조와 인간의 창조, 인간의 범죄, 구원의 약속, 그리고 예수를 통한 구원 사건에 이르기 까지 하나의 통일된 목적과 계획의 흐름을 수없이 이야기하고 있기 때문이다.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대로 창조되지 않았고, 아담의 범죄로 인해 세상에 죄가 들어오지 않았다면, 끊임없이 이스라엘 백성을 그의 길로 인도하시기 위해 애쓰시고 때로는 징벌하시는 하나님은 결국 존재하지 않거나, 자기만족에 빠진 절대자로 생각될 수밖에 없다.”
3) 결론
예비 생물교사들을 대상으로 진화에 대한 수용과 인식이라는 주제로 연구를 진행한 논문에 다음과 같은 연구 결과를 낸 것이 있다. ”종교에 따른 유의미한 차이는 없었지만, 기독교인 예비 생물교사들이 무교인 예비 생물교사들에 비해 진화 개념 이해 정도가 조금 높았지만 진화 수용도의 결과에서는 무교에 비해 기독교인 예비 생물교사들의 진화수용도가 유의하게 낮으며 수업 시연에서도 오개념이 유의하게 많이 나타나는 것으로 결과를 낸 바가 있다. 이는 개신교인 예비 생물교사들의 인지 구조에 정착되어 있는 오개념이 드러났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이는 구성주의에서 말하는 개념변화모형 중 선행지식이 과학적 개념과 동시에 인지구조 속에 자리 잡고 있거나 여러 가지 과학적 개념 중 일부만이 선행지식에 혼합되어 있는 경우(조희형 외, 2005)에 해당된다고 생각한다.“
여기에서 말하는 오개념이라고 표현되는 선행지식, 즉 창조론이 정말로 오개념으로 취급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회의감에 의해 과학이라는 학문에 실증이 났던 경험이 있다. 내가 과학을 공부하면서 가장 힘들었던 점은 왜? 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던져야 한다는 점이였다. 과학은 의심의 학문이며, 왜 그럴까 라는 창의적이라는 보기 좋은 단어 뒤에 계속해서 의심해야만 하는 점이 내가 가장 지치는 부분이기도 했다. 그렇다면 과학이라는 학문은 과연 진리를 추구하는 학문이며, 오랜 기간 동안 많은 사람들이 절대적 진리라고 믿어왔던 이론들과 가설이 오늘날 현대에 와서 잘못된 것임을 다시 알게 되는 것과 같이. 지금도 전 세계에서 계속해서 이루어지고 있는 그 연구의 시작이 잘못된 것이라고 한다면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과학적 사실들은 과연 ‘진짜’인 것인가?
나는 ‘성경 말씀‘과 ‘믿음’으로 모든 것을 결론지을 수 있었다.
성경은 이와 다르다. 신명기 13:4에는 ‘너희는 너희 하나님 여호와를 순종하며 그를 경외하며 그 명령을 지키며 그 목소리를 청종하며 그를 섬기며 그에게 부종하고’라고 말하고 있으며, 에스겔 20:19에서는 ‘나는 여호와 너희 하나님이라 너희는 나의 율례를 좇으며 나의 규례를 지켜 행하고’라고 한다. 우리는 그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과 말씀을 통해 순종하는 삶을 살아가면 되는 것이다. 이는 물론 단순한 행위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진리의 성경 말씀과 예수님의 십자가 보혈을 통해 우리가 구원을 얻었다는 것을 알고 하나님 말씀을 지켜 행하는 것에 힘쓰면 되는 것이다.
이것이 자칫하면 성경을 그대로 믿는 것이 단순하고 고차원적이지 못하다고 들릴 수도 있겠지만 그것 이상의 의미를 알아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 가운데 우리가 살아가는 이 삶 속에서 어떠한 것이 더 중요시 되어야 하며 어떤 삶을 살아가는 것이 더 ‘가치로운 것’인가 라는 질문을 계속해서 스스로 해온 것에 대한 대답이 지금 내가 걸어가고 있는 신학도로서의 길인 것 같다. 우선순위 적인 ‘가치’만의 문제가 아닌 성경을 통해 하나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 모든 순간 순간 마다 관여하시고 하나님의 섭리 가운데 우리가 살아갈 때에 하나님께서 언제나 우리와 함께하신다는 것을 깨닫고, 밤낮 할 것 없이 우리를 관망하시는 하나님의 모습을 알 수 있고, 이때 낮은자의 자세로 절대적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고 하나님의 계획하심 속에 내가 죽고 하나님께서 나의 주인 되심을 고백할 때에 기쁨과 희망이 가득하고 이때에 비로소 나의 삶을 통해 하나님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왜 이러한 보편적인 유신진화론에 대해 동의하는 것인가. 전도에 조금 더 부담스럽지 않고 거부감 없이 말씀이 전파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또는 내가 철저하게 성경을 믿기 때문에 유신진화론과 조금은 타협해도 나의 신앙심은 흔들리지 않는다는 안일한 생각 때문에? 이러한 것들은 영적으로 망하게 될 것이라고 생각한다.
분명히 과학은 우리의 삶을 더욱 편리하고, 삶의 질을 높여주고, 질병을 치료하는 목적으로도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절대적으로 하나님의 말씀에 반하는 내용을 담은 유신 진화론과을 학문간의 충돌을 피하기위해서 또는 젊은 많은 세대들에게 쉽게 설명하며 대답을 회피하기 위해 부분 인정하는 모습으로도 타협하는 태도를 가져서는 안 된다는 것을 결론으로 이 글을 마무리하고 싶다.
이 글은 저의 신앙관을 바탕으로 쓴 글임을 밝힙니다 >., <
1. 김병훈. "[논평] 유신진화론 비판(권수경, 박찬호 교수)." 월례포럼 83.1 (2020): 70-77.
2. 윤영민. "예비 생물교사의 진화 개념에 대한 이해, 진화수용도, 교수곤란도와 수업 내용 분석." 국내석사학위논문 전남대학교 대학원, 2019. 광주
3. 신화석. "지적설계를 통해 본 유신론적 진화론 비판." 국내석사학위논문 장로회신학대학교 신학대학원, 2010. 서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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