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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신학] '종교사회주의' 현대신학자 레온하르트 라가츠에 대하여

by 독사(δόξα) 2022. 9.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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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온하르트 라가츠의 생애

레온하르트 라가츠는 1868728일에 스위스 산간마을인 타민스(Tamins)에서 소작인의 아들로 태어났다. 가난한 살림살이라 어릴적부터 노동을 해야 했으며, 농민들의 협동조합운동에서 사회주의를 찾았다. 장학금을 받기 위해 신학공부를 하였으며 바젤, 예나, 베를린에서의 공부를 마치고 마침내 개신교의 온하르트는 하이젠베르크에서 첫 목회를 시작하였지만 잘 되지 않았다. 그는 헤겔철학과 성서를 공부하여 진지하고 실천적인 신학자였다. 하지만 교회와 친구 목사들은 그렇지 못했다. 그들은 실천적 신앙에 관심이 없었고 천박하였다. 우울증에 시달릴만큼 정신적인 고통에 시달리던 라가츠는 김나지움에서 언어와 종교를 가르쳤다. 1895년부터 1902년까지 쿠르시 교회에서 목회했고, 1902년부터 바젤 대성당에서 목회를 이어나갔다. 그는 1908년부터 1921년까지 취리히 대학교에서 조직신학과 실천신학을 가르치기도 했다.

 

라가츠는 독일교 개신 신학자인 크리스토프 블룸하르트와 만났고 자본가와 결탁한 독일제국 정부의 탄압으로 권리를 억압받는 노동자와의 연대로 그리스도의 삶을 본받고자 한 블룸하르트의 영성은 라가츠에게 좋은 영향을 주었다고 할 수 있다. 라가츠는 1921년 가르텐호프를 설립하여 노동자 교육에 힘을 썼다. 이후 저술활동, 사회운동(노동운동, 반 나치운동, 평화운동)을 실천했다. 그리고 그는 1945년 별세하였다.

 

레온하르트 라가츠(1868 - 1945) 출처 :구글위키백과

 

주요 사상

라가츠는 처음에는 자유주의 신학과 관념주의의 영향을 받았다. 그래서 그는 인류가 하나님 나라를 향해 윤리적으로 발전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바젤에 온 이후로는 신학적 정치적 자유주의를 멀리하게 되었고, 결국 그는 경건주의적 경향에서 그리스도 중심적 신학으로 수정되었다. 그의 목표는 항상 윤리적 인격, 자유로운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것에 있었다.

 

그는 자율에 대해 절대적인 것으로 보지 않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인간의 무한한 존엄성에서 기반을 둔 자율은 항상 보장되어야 한다고 믿었다. 그래서 라가츠는 처음부터 모든 강압, 타율적 규정은 목표로 인도하지 못하는 그릇된 길이라고 보았다. 그는 하나님이 인간을 갑작스럽게 타율적으로 구원하거나 변화시키지 않고, 단계적으로 자신에게 인도한다고 믿었고, 그 방법은 도덕적, 윤리적인 것이라고 확신했다.

 

그러나 그거 쿠르 시의 목사로 부임한 후 사회문제에 대해 관심을 갖기 시작하면서 헤르만 신학의 영향으로 예수전에 관심을 갖기도 했으며, 실천적으로 노동자 교육과 개혁운동에 관여하기 시작하였다.

 

결과적으로 라가츠는 현실의 모든 영역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세상의 나라 간의 투쟁이 진행되고 있다고 보았으며, 이 두세력은 서로 섞여 있으나,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하나님의 나라가 순수하게 등장한다고 주장하였다.

 

그는 현실안주적 그리스도교라는 종교는 세상의 영역과 영적 사이를 갈라놓는다고 비판하기도 하였으며, 종교와 권력, 그리고 그것에 대한 소유와 교회의 위기를 종교적 위기에서 기인한다고 했다. 또한 자본주의와, 과학적 사회주의를 비판하는 등 진정한 기독교는 사회주의 안에서 윤리적으로 새로이 결합될 필요가 있다고 주장하였다. 그러면서 최상의 형태는 협동조합이라며 계급투쟁을 통해 대립을 극복하고, 폭력과 독재에서 새로운 생활방식과 새로운 정신태도가 필요하다고 했다.

 

저서 소개

주요 저서로는 <하나님 나라의 비유들 - 예수의 사회적 복음, 예수의 산상설교, 성서의 하나님 나라> 등이 있다. 이를 통하여 스위스의 울타리를 넘어 유럽 전역에 많은 정신적 영향을 남겼다. 그는 최초로 종교사회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하고, 종교사회주의 운동을 조직하여 이끌었는데, 그로 인하여 그는 유럽의 종교사회주의 운동의 대부로 일컬어질 만큼 큰 추앙을 받았다. 그는 새로운 길(Neue Wege)’라는 잡지를 창간하여 말년까지 집필에 몰두했는데 그가 세상을 떠날 즈음에는 39권을 마감하고 있었다.

 

한계 및 평가

칼 바르트는 레온하르트 라가츠와 함께하기도 했지만 이후에 라가츠가 창간한 새길에 대해서 서평을 편집자에게 보냈다. 이 서평에서 바르트는 하나님의 행동에 대한 조용한 기다림을 중요시했다. 다시말하면 어린아이처럼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새삼스럽고 유별나게 행동할 것이 아니라, 조용히 하나님의 행동을 기다려야만 한다 것이다.

 

이는 사실상 라가츠의 종교사회주의운동에 대한 간접적인 공격이었다. 이에 라가츠는 바르트의 불룸하르트의 이해가 너무 협소하다며 바르트에게 회답을 보내며 서평을 고쳐 써달라는 요구를 하기도 했다. 결국 수정 없이 스위스 자유노동자라는 잡지에 실려 출판되었으며 이는 1919베른의 G.A. 베슬린 출판사에 의해 간행된 로마서1판에서 심화되었다. 라가츠는 단호하게 하나님 나라 안에서의 공동투쟁하나님 나라의 실현을 위한 투쟁을 강조한다. 또한 바르트는 라가츠가 하나님의 계시를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의를 뒤섞어 놓은 것이라고 비판했다. 즉 이는 하나님의 주제를 인간의 종교적 도덕적 의로 이념화 하는 결정은 하나님을 모욕하는 것이라는 말이었다.

 

이후에 라가츠는 바르트의 변증법적 신학은 복음을 삶으로부터 신학으로, 교리체계론 또한 교리고백으로 갈라놓는다. 사회윤리적 중요 요점의 상대화 바로 이점이 변증법적 신학에 대한 라가츠의 공격 표적이었다. 이와 동시에 바르트에게 있어서 교회주의의 재구성이 문제되고 있다며 비난을 퍼부었고 하나님의 나라의 발전은 땅과 관계되며 현시대 안에서의 그 나라의 실제적인 승리와 관계된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하나님의 현실을 분리하는 것을 단호하게 거부한다. 말씀과 현실은 일치되어야 한다는 의미이다. 그러나 이에 대해서 변증법적 신학은 말씀을 궤도로 정하고 현실을 엉뚱한 데에 넘겨주었다는 오류에 대해서 잘못된 태도전환에 있다고 말하였다.

 

단네만은 바르트가 종교사회주의의 중심 주제를 종교사회주의와 적절하고 타당한 대화없이 자신의 고유한 개념으로 통합하려 시도했다며 비판하였고 총체적으로 라가츠의 종교 사회주의와 유사성보다는 거리감이 더 컸다고 평가하였고

 

라가츠가 우리가 온갖 신학적 체계와 온갖 교회적 기구들의 한계를 보았던 빛이었다면 바르트를 향해 방향이 잡힌 신학과 오늘의 종교사회주의 신학자들 간의 진정한 대화의 지향은 오늘의 신학의 새로운 갱신을 위하여, 교회의 갱신을 위하여 필요 불가결한 일이라는 평가를 받게 되었다.

 

라가츠와 바르트는 서로의 강력한 비판에 대하여 슬프게 느낀다라고 표현하게 된다.

 

나의 평가

철학적으로 너무나 무지한 나의 입장으로서는 그들의 대화는 사실 짧은 시간에 모두 이해하기에는 어려움이 있었다. 한 가지 생각해 공감하는 부분은 교육와 사람들의 협력에 대한 생각에는 동의하는 바이다. 라가츠는 통합교육을 말했던 것이라고도 생각을 하게 되었다. 이는 곧 교육과 현장을 합친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던 것이 아닌가 생각이 들게 되었다. 현재 우리나라에서도 너무 지식 중심의 교육보다는 실제로 우리시대에도 이러한 통합 교육의 필요성에 대해 많은 관심을 두고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는 이러한 교육에 대한 중요성을 강조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사회주의는 연대와 공동체를 중요하게 여기면서도 자칫 잘못하면 흔히 말하는 운동권의 사람이 될지도 모르겠다. 하나님의 강력한 활동에 있어서 피동적인 자세로 있어서는 안된다는 그의 주장은 인간이 함께 참여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실현하는 것이 하나님의 숨은 뜻이라고 주장한다. 예수를 뒤따르는 제자들이라는 이름아래 예수님이 겪었을 모진 고난과 폭력, 수난에 대한 그 고통에 참여해야 할 것. 이를 통해 예수님의 십자가 사랑을 알 수 있다고 말하는 것. 어쩌면 자본주의 사회에 너무나 익숙해져 있는 우리들에게 필요한 메시지 일 수도 있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잘못된 개혁을 추구하는 사람들의 선동에 쉽게 휘말리기도 한다. 나는 이러한 그의 주장 보다는 바르트의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으로 돌아가서 하나님의 때를 기다려야 한다는 생각에 조금더 동의하는 바이다. 그저 우리는 하나님이 이루실 그 때를 바라보며, 하나님이 뜻하신 일에 동참하는 사람이어야 하지 않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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